글

20261104>1115 김동우 | Bounce free

이미지
 이불집을 하던 친구네 집의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화려한 색의 천으로 덮인 피아노와 마주하곤 했고, 왼편으로 돌아서면 보이는 그의 방은 나뭇결이 보이는 창틀 너머로 푸른 빛이 쏟아지곤 했다. 어찌할 수 없는 긁적임이나 뒷모습과 가려운 듯 찡그린 표정을 어릴적부터 자주 보였던 그는 최근 어느날 스스로 저편을 향했다고 들었고 나는 요즈음 그를 자주 생각하고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내가 무관해보이는 요소들, 이미지를 캔버스 화폭에 동시다발적으로 그린 것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이어지게 붙잡기 위함이였고 그것들은 자연스레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생성했다. 그 시간들-행위 속에서 먼것과 가까운것의 구분은 희미해지고 나에게 있어서 심리적 거리가 물리적인 것보다 더 중요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바로 앞에 일어난 현실의 일들이나 사건, 그리고 남겨진 것들이 작지만 나를 강렬하게 바라보는 단단한 시선으로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재 이후에 남아있는 것-(가령 나의 할아버지의 유품 등)을 보고있으면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의 모양은 그 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형태인지 혹은 이미 주어진 것들의 조합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연히 할아버지의 유품정리 중 흑백사진을 정리하던 계기로 시작한 종이드로잉은 나의 페인팅의 뒷면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프레임을 먼저 상정하지 않고 형태를 자유롭게 끊어내는 그 순서도 반대고, 그림에 나온 사람들도 대부분 뒤돌아 서있거나 어딘가에 숨어있으니 그 또한 반대일지 모른다. 그런 페인팅-드로잉의 관계를 내가 스스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아직 확언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 보이는 사실은 종이는 내가 이전에 마주한 [프레임-캔버스]와는 약간 다르다. 팽팽함도 없고 튕김도 없다. 그리고 표면에 바로 흡수되는 미세한 반응들이 나를 더 부담스럽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주체못할 간지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올해 내가 대부분 마주해온 종이들은 그런 탄성(bo...

20261021>1101 이민경 | 균열 생장: HABITAT

이미지
작가 노트 공학은 재료에 생긴 균열이 길어지는 현상을 '균열 성장'이라 부른다. 파손이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고, 측정하고 늦추고 막아야 할 대상이다. 나는 같은 현상을 '생장(生長)'이라 고쳐 부른다. 생장은 식물학이 살아 있는 것에만 쓰는 말이다. 한 글자를 바꾸면 도로의 결함은 자라는 것이 된다. 나는 도시의 길을 걸으며 균열을 고른다. 모든 균열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걸음을 멈추게 하는 틈 앞에서 한지를 겹겹이 올려 그 깊이와 가장자리의 부스러짐까지 떠낸다. 바닥에 움푹 패여 있던 음각은 종이 위에서 양각으로 솟는다. 발아래 수평으로 누워 있던 것은 벽에 걸려 눈높이에서 관객과 마주 선다. 작품의 주재료인 한지는 나무에서 왔지만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재료다. 아스팔트도 자연에서 나와 가공된 물질이다. 같은 내력을 지닌 두 재료가 균열이라는 자리에서 만난다. 젖은 한지의 섬유는 틈의 미세한 요철까지 따라 들어간다. 이 작업이 한지여야 하는 이유다.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맨홀과 그 둘레의 균열을 함께 떠낸 작업이 있다. 맨홀 뚜껑에는 격자와 문자가 새겨져 있다. 누군가 설계하고 규격을 정하고 관리하는 원이다. 그 원의 바깥으로 균열이 뻗는다. 어느 도면에도 없고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은 선이다. 녹색은 그 선의 도드라진 자리에만 얹었다. 식물을 그리지 않았는데 균열이 식생으로 읽힌다. 연작의 이름인 서식지(HABITAT)는 이 틈들을 가리킨다. 인간이 설계한 도시라는 문명의 발밑에 균열이 가해지고, 나는 그 균열을 통해 인간이 뒤덮은 세계에 조용히 자생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찾아낸다. 아스팔트의 틈은 잡초와 이끼가 깃드는 미세 서식지다. 도로는 평평하고 매끈해야 하는 관리의 대상이고, 균열은 곧 메워진다. 내가 떠낸 틈도 언젠가 보수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메운 자리는 다시 갈라진다. 나는 그 반복을 누구의 실패나 승리로 읽지 않는다. 도시의 표면이 인간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조용히 갱신되고 있을 뿐...

20261002>1014 정규형 | 누구도 적지 않은 날들

이미지
 

20260902>0913 김종혁 | 內面構造學 내면구조학

이미지
 

20260522>0603 박주미 | 움집 Hide in to the home

이미지
 

20260506>0517 이정희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130.3x80.3cm, oil on canvas, 2026   작가노트   나의 작업 속 좌절이 있는 낙원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과 우리가 존재하는 이 불완전한 자리. 그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감정들을 담는다.   우리는 어떤 회화를 남겨야 하는가. 결국 이 질문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꿈꾸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불안과 결핍, 좌절을 안은 채 각자의 방식으로 낙원을 상상하고 살아간다. 거기에서 출발하여 좌절이 있는 낙원이라는 역설적인 풍경을 그린다. 화면 속 자연은 때론 밝고 따뜻한 빛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 안에 놓은 인물들은 고요 속에서 각자의 감정을 견디고 있다. 서로 가까이 존재하면서도 완전히 닿지 못하고, 휴식과 불안은 동시에 머문다. 이 장면들은 이상향의 이미지와 현실의 감정이 겹쳐진다.   작품 속 낙원은 완성된 장소가 아니라, 변화하는 상태에 가깝다. 그것은 각자가 지닌 아픔과 고민, 불안을 포함한채로 존재한다. 자연풍경을 변형하고 재구성하며, 동시에 인물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내면의 상태를 시각화 한다. 특히 꿈이라는 개념이 작업에 내재되는데, 여기서 꿈은 두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하나는 잠 속에서 경험하는 무의식의 장면이며, 다른 하나는 미래를 향한 희망으로서의 꿈이다. 이 두 의미가 서로 겹쳐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꿈에서 포착한 이미지에서 작업이 시작되기도 하며, 감각과 기억이 혼합되어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최근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밤의 어둠 앞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 쏟아지는 물의 거스를수 없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의 긴장감. 이러한 상황속에서 인물은 멈추기보다는 그 안에서도 나아가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때 화면에는 머무름과 움직임. 안정과 위태로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나는 완전한 이상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우리는 왜 여전히...

20260417>0429 서휘 | 미치광이 이웃이 사는 집 The house with the crazy neighbor

이미지
미치광이 이웃이 사는 집, 2025, oil on canvas, 90.9×72.7cm -작가노트 내가 사는 동네에는 돈사가 있고, 그곳에서 풍기는 냄새 때문에 주민들은 많은 불편을 호소한다. 그러나 축사는 인간이 육류를 소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기덩이를 먹기 위해서는 동물의 고통과 혐오스러운 공간이 필요하며, 우리는 이를 소비함으로써 그 착취의 구조에 자연스럽게 동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존재를 단지 ‘불쾌한 이웃’으로 치부한다. 내 작업은 이러한 외면과 배제의 구조에서 출발한다. 나는 이번 작업에서 사회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고도 쉽게 타자화해온 존재들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소비의 구조는 가축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삶과 몸, 그리고 서사를 끊임없이 소비한다. 특히 성노동자나 미디어 속 인물들은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된 채 쉽게 판단되고 평가된다. 그들의 복잡한 맥락은 지워지고, 자극적인 장면과 단편적인 정보만이 남아 소비된다. 이 과정에서 타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흥밋거리로 전락한다. 최근 나는 유명인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 드러났을 때, 이를 거의 용서하지 않으려는 대중의 반응에 주목하고 있다. 잘못의 크기나 맥락과 무관하게 한 번 흠집이 생긴 인물은 빠르게 낙인찍히고 집단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 과정에서 비판은 쉽게 도덕적 우월감으로 전환되며, 개인의 실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는 이미지로 소비된다. 이는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라기보다, 타인을 단죄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전한 위치에 두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결함과 균열을 응시하는 동안 자신의 불완전함은 잠시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인의 삶은 하나의 ‘볼거리’ 로 기능하며, 존재는 맥락을 잃고 단지 소비되기 위한 이미지로 남는다. 이번 시리즈의 제목인 「미치광이 이웃이 사는 집」은 이소호 작가의 단편소설 『나의 미치광이 이웃』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표현은 이해되지 않는 존재를 불편해하고, 타자로 밀어내려는 사회의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