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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1>1113 최희준 l 수상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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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세계>는 사라짐과 생겨남 사이의 중간 상태를 탐구한다. 최희준은 일상에서 사라지고 움직이는 미묘한 순간들을 그리며, 그 과정에서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아쉬움을 반복해서 경험한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세상의 순간순간이 사실은 해체와 재구성의 연속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마치 물의 표면이 빛과 함께 끊임없이 흔들리듯, 그의 작업에서도 선과 색은 하나의 형태에 머무르지 않고 흐트러지고 섞이며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낸다. 최희준은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좀처럼 답을 내릴 수 없는 의심스러운 감정을 ‘수상한 세계’로 풀어내고 있다. 그가 느낀 수상함은 일상 속에서 잘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변화에 대한 낯섦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세계는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 변화의 속도나 방향을 쉽게 체감하기 어렵다. 바다의 파도와 모래사장은 언제나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진다. 어항 속 물고기, 날아가는 새, 사람들의 모습 또한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닌 수많은 관계와 사건이 얽혀 이루어져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형상은 끊임없이 유동하며 한 순간도 같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모든 것은 잠깐의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며 언젠가는 사라지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 희미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계속해서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최희준은 작업실 앞 개천에서 시작한 야외 드로잉을 통해 물 속에서 반사되고 흐트러지는 장면을 포착하고, 이후 수족관과 바다로 여러 대상을 탐색해 나갔다. 그의 작업에서 시간은 고정된 형상이 아닌, 계속해서 변형되고 해체되는 선과 색감의 흐름으로 표현된다. 어항, 물고기, 바다와 같은 형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선과 선 사이의 유동적인 공간에서 변형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의 작업에서 세상의 사물들은 고정된 형상이 아닌, 흩어지는 선들의 집합으로 그려지며, 이들은 움직임과 상호 관계 속에서 새롭게 정의된다. 이러한 과
20241018>1030 민은희 l 장미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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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파워 어느날 구석진 모퉁이에서 장미들이 쏟아졌다 바닥을 드리운 핑크 점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일렁이며 펼쳐져있다 하나의 얼굴얼굴이 아니라 빨간 그들 너의 핑크빛 볼 비릿한 향기 그 속의 나 나는 우르릉 깊숙하게 펄떡였다 소용돌이는 멈추어도 소용이 없다 수확시기가 지난 파는 파꽃이 펑펑 길고 날카로운 기지개에 부드럽고 싱싱한 다시 시/작/ 펑팡펑핑 슈우욱 장전 완료 목표물은 미정 아무도 모름 반동을 준다 팽팽하게 장미파 그리고 war 핑크에 초록에 햐얗고 포슬한 총알 가장 짧은게 반드시 가장 빠른 길은 아니라는데 계속 가는 것 멀리서 보면 장엄하게 아름다운 가까이에서 보면 작은 숨의 촉촉한 설렘
20241002>1013 보라리 l 본영(本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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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그리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2길 21)는 10월 2일부터 10월 13일까지 보라리(BoraLee) 개인전 <본영 UMBRA>를 개최합니다. 본영(本影)"이라는 용어는 그림자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의미하며, 빛이 완전히 닿지 않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번 전시에서 보라리는 불안이 층층이 쌓여 형성된 내면의 그림자를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보라리는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텍사스 대학교 샌 안토니오에서 순수미술 석사 학위와 홍익대학교에서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16년 환기미술관, 2020년 대구예술발전소와 2023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또한 파라다이스 문화재단과 양평군립미술관, 오산시립미술관 등 다수의 미술 기관에서 개최한 단체전에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2021년 서울시 양천구에 설치된 ‘연잎 징검다리’와 과천 서울대공원의 ‘솜사탕 코끼리’ 그리고 인천공항 제2청사의 ‘난외-2개의 길’ 공공미술 작품을 전시하였습니다. 현재는 경인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 조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작업 자체가 선과 공간의 관계를 끝없이 조율하는 일이기에 보라리에게는 “공간 자체가 작품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조형 요소”이다. 물리적인 장소뿐만 아니라 작품 내에서 선이 차지하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을 동시에 지칭하는 개념으로서다. 가끔은 채운 자리 만큼이나 비운 자리의 모양이 중요하고, 빛나는 형상보다 그것이 만들어낸 그늘이 아름다워서 그렇다. 화면 속 얼기설기 엉킨 형상이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같고, 무언가 머물다 간 흔적 같다.“ 이 글은 박미란의 「보라리: 공간에 드리운 선과 그림자, 공백들」(2023)중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이번 개인전 <본영 UMBRA>는 내면에 자리한 불안을 탐구하고, 그것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얽히고 쌓이는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작품 속에서 "본영(本影)"은 마치 무형의 감정들이 시간과 함께 중첩되
20240901>0913 조예서 l 하늘의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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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뼈 조예서 | 작가노트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한 길을 걸어왔다 . 하늘색 황혼으로부터 시작된 이 길은 아주 오래도록 내게 머물러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를 덮을 것이다 . 세상과 닿을 수 없는 , 가장 좁고 어두운 길 . 보잘것없는 곳 . 연약한 곳 . 낮은 곳 . 우리가 함께하는 곳 . 이 길에서 수집했던 아름다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마음에 모아두었다 . 새의 지저귐 , 반짝이는 별 , 피어나는 달 , 타는 해 , 흩날리는 구름 , 흐르는 무지개 , ...... 비겁한 마음이 모두 떠나가도록 나의 몸 , 가장 건조한 곳까지 흘려보낸다 . 희미해진 감각을 깨우고 가난한 생각을 벗겨내어 , 나를 지우고 너를 그리는 경계를 소리 낸다 . 너와 나 사이로 길게 뻗은 견고한 이 길은 시작과 끝을 알 수는 없지만 , 나의 이름을 짓고 나의 나라를 세우며 죽은 세계를 경작하던 나에게 ‘ 너 ’ 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 나의 이기심으로 물들어버린 이 길을 고이고이 닦아 온전히 네게 향할 수 있게 , 나의 슬픔과 상실을 하나하나 디뎌가며 새하얀 길을 빚는다 . 언제쯤 네게 도달할지 알 수는 없지만 ,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그저 성실한 걸음만이 너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 너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내어주겠다고 ,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길 곳곳에 나의 목소리를 두드린다 . 너를 사랑할 수 있도록 축적된 시간이라면 , 어떠한 고난 속에도 , 스미는 기다림으로 이 길을 걷기 원한다 . 나는 평범한 가장자리를 걷는다 . 가장자리의 심성은 ‘ 날마다 ’ 로부터 재현되는 법이니까 . - 나는 비우기 위해 작업을 한다 . 가득 채워진 공간에 텅 빈 공간을 부은다 . 비운 마음을 그려낸다 . 여백의 시간은 하늘의 무한을 땅의 무수로 가지고 오고 , 나의 울타리를 언제 어디서나 좁히고 펼 수 있게 네 마음의 반경에 깃들게 한다 . 이 유기적인 거리는 빛의 꼬리를 물고 , 되돌아가고 싶은 길목에서 나를 회복과 인내의 궤도에 올려놓곤 한다 .
20240529>0609 이주연 l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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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작가는 세대 간의 차이부터 지역과 이념 등 극에 달해있는 갈등의 원인을 현대의 삶에서 비롯된 소통의 부재라 생각한다. 사회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포용하고 양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포용을 실천하기 위함에는 이해가 전제로 깔려야 하지 만, 타인은 물론이거니와 자신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이다. 이러한 이유로 작 가는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현대인만의 답이 도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적인 동물이라 불리는 인간은 과연 어떠한 존재인지 의문을 던지며, 이성과 본능이 변증하는 관계를 시각화하여 인간을 표현한다. 온전한 흑(黑)도 백(白)도 없는 화면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얽히고 설켜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이 성과 본능의 성질을 비춘다. 또한 형상과 층층이 겹친 드로잉을 통해 인간의 비이 성을 즉흥적으로 담아낸다. 전시 서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한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있을까?” 전시명이자 작품명인 <단면>은 불교 경전 ≪열반경(涅槃經)≫에서 나온 맹인모상(盲人摸象) 우화를 모티브로 시작되었다. 하나의 코끼리를 만져본 장님들이 제각기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네 발로 기는 인간과 유사한 형상을 각각의 프레임에 나누어 좁은 시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형상마저 왜곡되어 보이는 구도와 해당 왜곡을 증폭시키는 배치는 관람객이 전체를 바라보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로 마주하게 한다. 작가는 해당 시야를 통해 과연 진리의 본질을 보고 있다 말할 수 있는지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와 동시에 작가 자신이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 즉 자아를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닌지 회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