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불집을 하던 친구네 집의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화려한 색의 천으로 덮인 피아노와 마주하곤 했고, 왼편으로 돌아서면 보이는 그의 방은 나뭇결이 보이는 창틀 너머로 푸른 빛이 쏟아지곤 했다. 어찌할 수 없는 긁적임이나 뒷모습과 가려운 듯 찡그린 표정을 어릴적부터 자주 보였던 그는 최근 어느날 스스로 저편을 향했다고 들었고 나는 요즈음 그를 자주 생각하고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내가 무관해보이는 요소들, 이미지를 캔버스 화폭에 동시다발적으로 그린 것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이어지게 붙잡기 위함이였고 그것들은 자연스레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생성했다. 그 시간들-행위 속에서 먼것과 가까운것의 구분은 희미해지고 나에게 있어서 심리적 거리가 물리적인 것보다 더 중요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바로 앞에 일어난 현실의 일들이나 사건, 그리고 남겨진 것들이 작지만 나를 강렬하게 바라보는 단단한 시선으로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재 이후에 남아있는 것-(가령 나의 할아버지의 유품 등)을 보고있으면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의 모양은 그 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형태인지 혹은 이미 주어진 것들의 조합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연히 할아버지의 유품정리 중 흑백사진을 정리하던 계기로 시작한 종이드로잉은 나의 페인팅의 뒷면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프레임을 먼저 상정하지 않고 형태를 자유롭게 끊어내는 그 순서도 반대고, 그림에 나온 사람들도 대부분 뒤돌아 서있거나 어딘가에 숨어있으니 그 또한 반대일지 모른다. 그런 페인팅-드로잉의 관계를 내가 스스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아직 확언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 보이는 사실은 종이는 내가 이전에 마주한 [프레임-캔버스]와는 약간 다르다. 팽팽함도 없고 튕김도 없다. 그리고 표면에 바로 흡수되는 미세한 반응들이 나를 더 부담스럽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주체못할 간지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올해 내가 대부분 마주해온 종이들은 그런 탄성(bounce)이 없다.
하지만 덕분에 나의 드로잉은 프레임의 구속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시선의 탄력을 얻었다. 기존의 화면에 흩어졌던 이미지는 뒤늦은 쓸쓸함이 밀려오듯 발 아래 굽이친다. 그래서 난 다시 어릴 적 친구의 이불집 그 계단을 올라갈 때를 떠올려본다. 계단을 두드리며 올라가지만 우리는 그리 제법 빠르지도 않았고, 튀는 말도 표정도 없었고, 피아노의 흑백 건반은 화려한 이불의 색과는 제법 못 어울렸고, 나뭇결이 보이던 창문틀 같은 판넬 앞에 마주한 상황은 조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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